어느 해 겨울, 까만 교복을 입은 작고 가녀린 14살 소년이 버스를 타고 미아리 고개를 힘겹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버스 창에는 성에가 잔뜩 끼어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당시 한창 유행하던 라디오 드라마가 흘러나왔습니다. 국민 드라마가 텔레비전이 아니라 라디오로 나오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소년이 저였습니다.
그 시절 저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팝송에 한창 빠져 있었습니다. 카펜터스의 'Yesterday Once More', 비틀즈의 'Hey Jude', 올리비아 뉴턴존. 팝송을 좋아하던 외삼촌 집에서 학교를 다닌 덕에 일찌감치 팝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때 들었던 음악들이 제가 평생 PD의 길을 걸어온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 형들이 부르던 노래가 하나 있었습니다. 흑백 텔레비전에서 딱 한 번, 송창식이 그 노래를 부르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곧 화면에서도 라디오에서도 사라졌습니다.
'고래사냥'이었습니다.
1975년, 노래가 태어나자마자 갇히다
'고래사냥'은 1975년 개봉한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 주제가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작가 최인호가 노랫말을 쓰고 송창식이 곡을 붙여 직접 불렀습니다. 답답한 현실을 뒤로하고 동해 바다로 고래를 잡으러 떠나자는 노래. 청년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유신 시대의 검열은 이 노래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래사냥'은 금지곡이 됐고, 방송에서도 음반에서도 지워졌습니다. 노래가 다시 합법적으로 불릴 수 있게 된 것은 1987년 해금 조치 이후. 무려 12년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생각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듭니다. 저는 그 노래와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을 대표하는 노래를, 그 시절에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시대의 주제가가 시대에게 압수당한 셈입니다.
한눈에 보는 '고래사냥' 연대기
| 연도 | 사건 |
|---|---|
| 1975년 | 영화 '바보들의 행진' 개봉, 주제가 '고래사냥' 발표 (최인호 작사, 송창식 작곡·노래) |
| 1975년~ | 금지곡 지정 — 방송·음반에서 퇴출 |
| 1987년 | 해금 — 12년 만에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노래 |
부를 수 없어서 더 크게 불렀던 노래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금지곡이 된 노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캠퍼스와 술집에서 더 뜨겁게 살아남았습니다.
1986년, 군 제대 후 복학생으로 돌아온 캠퍼스. 학교 앞 술집에서 우리는 그 노래를 떼창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를 때면 왠지 모를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밀려왔습니다. 송창식 특유의 시원하게 내지르는 창법 탓도 있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목소리와 노랫말에는 꽃 같은 청춘을 마음껏 즐길 수 없었던 선배들의 아련한 애사(哀史)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PD로 30년을 일하며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콘텐츠의 힘은 전파를 타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 '고래사냥'은 12년간 전파를 타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목청에서 목청으로 전송됐습니다. 방송보다 강한 매체는 결국 사람입니다.
'바보들의 행진', 한국영화의 계보를 잇는 걸작
노래를 이야기하며 영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보들의 행진'은 한국영화의 계보를 잇는 걸작입니다. 억누르는 가슴을 부여안고 슬퍼하던 절규, 사랑할 수 없는 슬픔, 영혼을 잡아매는 역사의 애잔함이 그 안에 존재합니다. 웃기는 장면에서 웃다가, 어느 순간 목이 메는 영화. 그 시대 청춘의 초상이 그렇게 필름에 남았습니다.
영화 속 청년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곳이 동해였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지금이야 동해 바다가 차를 밟으면 2시간 거리지만, 그 시절의 동해는 고갯마루를 돌고 돌아 돌아도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바다였습니다. 그 바다 한번 보기가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동해로 떠나자'는 노랫말은 여행 계획이 아니라 탈출의 선언이었던 겁니다.
그 시절의 동해, 지금의 동해
그 동해에서 지금의 청춘은 서핑을 하고 맥주를 마시며 태양 아래 구릿빛 청춘을 뽐내고 있습니다. 좋은 시대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청춘이 청춘을 마음껏 즐기는 것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없으니까요.
다만 저는 이번 겨울, 여름이 아니라 겨울에 동해에 갈 생각입니다. 고래사냥 하러 말입니다. 낯설지만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황량한 바닷가. 남루했지만 영혼이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청춘이, 겨울 동해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고래사냥'은 언제 누가 만든 노래인가요?
1975년 발표됐습니다. 작가 최인호가 노랫말을 쓰고 송창식이 작곡해 직접 불렀으며,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 주제가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Q2. '고래사냥'은 왜 금지곡이 됐나요?
유신 시대의 검열 아래, 현실을 떠나자는 노랫말이 사회 불안과 퇴폐를 조장한다는 취지로 금지곡이 됐습니다. 저항의 상징처럼 불린다는 점도 당국에는 부담이었습니다. 발표 직후 묶여 방송과 음반에서 퇴출됐습니다.
Q3. 언제 다시 부를 수 있게 됐나요?
1987년 해금 조치로 풀렸습니다. 발표에서 해금까지 약 12년이 걸린 셈입니다. 다만 그 기간에도 대학가와 술집에서는 널리 애창됐습니다.
Q4.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어떤 작품인가요?
1975년 하길종 감독이 만든 청춘 영화로, 최인호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유신 시대 대학생들의 웃픈 일상과 좌절을 담아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고래사냥'과 함께 시대의 아이콘이 됐습니다.
Q5. '최PD의 음악다방' 지난 이야기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첫 회에서는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두 번의 실패 끝에 국민가요가 된 사연을 다뤘습니다. 블로그의 '음악다방' 라벨을 누르시면 시리즈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최PD의 음악다방, 두 번째 이야기를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고래사냥'은 어떤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까. 겨울 동해를 함께 그리워할 사연을 댓글로 남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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