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모두에게 아침이슬이 있었다.
45년 동안 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오늘 하겠습니다.
1. 나의 아침이슬은 느린 행진곡이었다
「아침이슬」은 저에게 행진곡이었습니다. 느린 행진곡.
그런데 어떤 빠른 곡보다도 저를 밀어올리는 힘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길 위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크리스천이 된 지금은,
그 시간이 기도에 가까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까지만 쓰면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뒤에 있습니다.
2. 고백 — 나는 관철동에 있었다
1981년, 82년, 87년, 88년. 서울 시내가 최루탄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
저는 현실 도피주의자였습니다.
분노는 했습니다. 그러나 제 본능은 늘 다른 곳을 향했습니다.
그 다른 곳이 어디였는지 이제 말하겠습니다. 종로2가 관철동 골목이었습니다.
80년대 초 생맥주 문화가 막 들어오던 때였습니다. 오비스 캐빈에서 생맥주를 마셨습니다.
종로의 코파카바나, 화신백화점 옆 마부 같은 디스코텍에서 열심히 놀았습니다.
관철동 골목에서 만나면 대일학원 옆 카페 누리로 갔습니다. 또래 여자애들과 맥주를
마시며 놀았습니다.
그 공간에 흐르던 노래들을 아직 기억합니다. 제이 가일스 밴드, 에릭 클랩튼의 「Wonderful Tonight」, 조용필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조동진의 「제비꽃」. 그 시절 관철동의 공기는 그런 소리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면, 문이 열리고 최루탄 냄새를 묻힌 또래들이 들어왔습니다.
신촌에서 데모하다 넘어온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냄새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옷에 배어 있으면 방 안 공기가 바뀝니다.
매캐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코가 아니라 목구멍 안쪽부터 긁힙니다.
그 아이들이 자리에 앉고, 술이 몇 잔 돌고, 누군가 「아침이슬」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저도 따라 불렀습니다.
3. 동상이몽 — 같은 노래, 다른 눈물
지금 생각하면 그건 동상이몽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를 생각하며 눈물지었습니다.
저는 덧없는 제 청춘을 생각하며 눈물지었습니다.
같은 방, 같은 노래, 다른 눈물.
제 눈물의 정체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닥쳐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불안, 실연의 고통.
그것들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는 지독한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그때는 그런 말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저는 우울증과 사투를 벌이며 「아침이슬」을 들었고, 학우들은 거리에서 저 대신
시대를 몸으로 막고 있었습니다.
저는 성장통을 앓는 젖비린내 나는 미숙한 청춘이었을 뿐이고,
동년배들은 길 위에서 현실을 몸으로 막아내며 피 흘렸습니다.
그들은 전사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절에 대한 부채를 안고 살아온 사람 중 하나입니다.
45년 동안 이 말을 못 했습니다. 창피했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이 노래는 어떤 노래였나
제 이야기를 잠시 접고, 이 노래가 지나온 길을 짚겠습니다. 제가 관철동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던 그때, 이 노래는 법적으로 불러서는 안 되는 노래였습니다.
1951년생 김민기는 서울대 회화과 학생이었습니다. 1970년에 이 노래를 만들었지만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악보를 찢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 찢어진 악보를 맞춰 붙인 사람이 양희은이었습니다.
1971년 대학 1학년 양희은이 데뷔 음반 첫 곡으로 실었고, 노래는 곧바로 퍼졌습니다. 그러자 만든 사람이 뒤늦게 그해 가을 자신의 1집에 담았습니다.
발표 직후 이 노래는 상을 받았습니다. 가사가 아름답다는 이유였습니다. 몇 년 뒤 같은 정부가 같은 가사를 불온하다고 판정합니다.
1972년 봄, 김민기는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를 부르다 연행됩니다. 직후 그의 음반은 법적 근거 없이 판매가 막혔습니다. 정식 금지곡 지정은 1975년 말,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해였습니다.
당시 약 2천 곡이 무더기로 금지되었는데, 대부분 '사회 통념 위반' 같은 사유가 형식적으로나마 붙었습니다. 「아침이슬」에는 그 형식적인 사유조차 붙지 않았습니다. 이유 없이 금지된 사실상 유일한 노래였습니다.
세간에 떠돈 이유는 이랬습니다. 태양이 묘지 위로 붉게 떠오른다는 첫 소절의 심상이 불온하다는 것. 조영남은 방송에서 그 단어를 바꿔 불렀습니다. 단어 하나를 바꿔야 부를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금지가 오히려 노래를 키웠습니다. 라디오가 틀어 주지 않으니 사람이 사람에게 직접 가르쳤습니다. 선배가 후배에게, 입에서 입으로. 악보 없이 배운 노래는 잘 잊히지 않습니다. 몸에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관철동에서 따라 부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누가 부르면 그냥 따라 불러졌습니다.
해금은 1987년입니다. 1975년부터 세면 12년, 1972년 음반이 사라진 때부터 세면 15년입니다.
5. 만든 사람은 무대 뒤로 갔다
김민기는 여러 차례, 이 노래를 저항이나 선동을 목적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노래를 저항가로 만든 것은 만든 이가 아니라 부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래가 국민가요가 된 뒤, 정작 만든 사람은 무대 뒤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1991년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열고 자신을 '뒷것'이라 불렀습니다. 무대에 서는 사람이 '앞것'이면 자신은 뒤에서 판을 까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33년간 359개 작품이 그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고 김광석, 윤도현, 박학기가 노래했고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조승우, 장현성, 안내상, 이정은이 그 무대를 거쳤습니다. 「지하철 1호선」이 학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학전은 2024년 3월 15일 창립 33년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재정난과 대표의 투병이 겹쳤습니다. 넉 달 뒤인 7월 21일, 김민기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73세. 유족은 조의금을 일절 받지 않았습니다.
그 공간은 지금 어린이·청소년 극장 아르코꿈밭극장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못자리가 못자리로 남았습니다.
6. 45년 뒤, 나는 거리에 있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뒤늦게, 아주 뒤늦게 저는 거리에 섰습니다. 제 자식뻘 되는 아이들과 나란히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에서 다시 「아침이슬」을 불렀습니다.
놀란 것은 그 아이들이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태어나기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노래를, 금지곡이었던 시절을 겪은 적도 없는 아이들이 함께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이 노래가 왜 죽지 않았는지.
이 노래는 무엇에 반대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적을 지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사연이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아침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 불러도 늦지 않습니다.
45년 전 관철동에서 제가 불렀던 노래와, 그 거리에서 아이들이 부른 노래는 같은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노래는 시대를 게워냅니다.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게워냅니다. 소화되지 못한 것이 기어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 시대가 어떻게 정의되든,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7. 하고 싶었던 말
저는 45년 전 「아침이슬」을 부르던 제 청춘에 연민을 느끼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썼습니다.
내 청춘의 어느 한 부분을 대신 살아준 친구들에게 — 고마워요.
「최PD의 음악다방」은 노래 한 곡에 얽힌 시대와 개인의 기억을 꺼내는 자리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모두에게 아침이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아침이슬은 무엇이었는지 댓글로 남겨 주십시오.
부록 — 아침이슬에 대해 자주 묻는 것들
Q1. 「아침이슬」은 김민기 노래입니까, 양희은 노래입니까?
작사·작곡은 김민기입니다. 1971년 양희은이 데뷔 음반에서 먼저 발표해 널리 알려졌고, 그해 가을 김민기도 자신의 1집에 수록했습니다. 김민기 버전은 피아노, 양희은 버전은 기타 반주입니다.
Q2. 금지곡이 된 정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식 사유가 명확히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이 노래의 특이한 지점입니다. 당시 무더기 금지곡 대부분에는 형식적 사유라도 붙었지만 이 곡에는 그마저 없었습니다. 첫 소절의 심상이 문제였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공식 기록으로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Q3. 언제 금지곡에서 풀렸습니까?
1987년입니다. 1975년 정식 금지 시점부터 12년, 1972년 음반 판매 중단부터 세면 15년입니다.
Q4. 김민기 선생은 언제 별세했습니까?
2024년 7월 21일, 향년 73세입니다. 2023년 가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2026년 7월 21일이 2주기였습니다.
Q5. 학전은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2024년 3월 15일 창립 33년 만에 폐관했고, 이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간을 이어받아 어린이·청소년 중심 공연장인 아르코꿈밭극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Q6. '뒷것'은 무슨 뜻입니까?
김민기 본인이 스스로를 부르던 말입니다. 무대에 서는 사람을 '앞것'이라 한다면 자신은 뒤에서 판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썼습니다.
※ 연대와 사실관계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언론 보도를 교차 확인해 정리했습니다. 금지곡 지정의 공식 사유 등 일부 대목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통설을 소개했음을 밝힙니다.
※ 저작권 보호를 위해 가사는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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